1992년의 일이다.
당시는 등산을 벗삼지 않았을 때다.
토요일 일과를 마치며 후배 둘에게 긴급제안을 했다.
“우리 무박으로 설악산 갈래?”
후배 둘과 남대문 시장의 로드 샵에서 K2가죽 등산화를 사신고 동대문시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발단은 일간스포츠를 보다가 각종 산행안내표를 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는 데모도 많았으므로 일과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다.
게릴라처럼 움직이는 젊은 무리들의 움직임에 따라서 헬멧과 방독면을 쓰고
취재를 다니다 보면 체력적인 한계에 부닥치기가 일쑤였다.
그러고 나면 저녁엔 으레 삼겹살과 25도짜리 쓴 소주로 판을 벌렸다.
소위 선배들이 수고했다며 격려하거나 깨기도 하는 자리이며 경험을
전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하여 취기가 오르면 또 다시 2차와 3차로 연결되는 건 기본이었다.
반복되었다.
회사에서 자빠져 자곤 다시 일과를 수행하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젊었다하나 체력은 밤낮으로 고갈되었을 때였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등산을 통해 심신을 가다듬어보고자 함으로 무박산행을
제안하게 된 것이다.설악산을 가보고 싶었기도 하였고,,,
한차를 가득 태운 버스는 늦봄 새벽의 오색에 우릴 내려줬다.
모든 것이 어색한 우리는 남들이 하듯, 손에 손전등 하나와 물과 빵,
그리고 목에 수건을 감고 앞사람의 발 뒤끝만 보며 산행을 시작했다.
대청봉을 거쳐 희운각에 이르자 가이드가 팀을 갈랐다.
체력이 안되거나 처음 오는 사람은 공룡능선을 타지 마라는 것이다.
우린 숙의 끝에 한 친구가 무릎이 매우 아픈 상태란 것, 우리 자신도 체력에 자신이
없단 점을 감안하여 아쉬운 마음을 접고 바로 비선대로 하산하는 길을 택했다.
공룡능선을 타고 내려와서도 쌩쌩한 처녀의 모습을 보고 창피함을 금치
못했던 기억은 한시도 떠나지 않았었다.
‘곧 다시 오마’란 다짐이요, 소원으로 변해갔다.
한동안은 언제든 갈수 있다고 믿었기에 바쁘단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고
살아온 세월, 그렇게 흐른 세월이 벌써 18년!
공룡능선을 가는 산악회마다 문의를 했으나 나 같은 사람은 거절되기 일쑤였다.
혹은 더 많은 단련을 한 후에나 오라는 것, 혹은 단체이므로 처질 경우 기다려줄 수
없다는 것 등 여러 이유로 나에게 겁(?)을 주어 감히 도전하려는 의지를 꺾곤 했었다.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며 사공에게 부탁했다.
공룡능선을 타보는 게 소원이니 나 좀 데려가 달라, 단체로 말고 몇 명만
가도록 하자, 내가 짐이 될 수 있으니,,,란 취지였다.
그것만이 내가 거길 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 같았다.
그런 바램은 작년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공이 바쁜가하면, 내가 바쁘기도 해서 잊고 지냈다.
연락이 왔다.
“10월 셋째주 쯤 가려고 하는데” -“엉 난 그날 피치못할 약속이 있어.”
“그럼 그 다음 주는?” - “그때도 그런데,,,, 어쩌나, 젠장”
“ 그럼 네가 가능한 날짜는 언제야?” - “11월 첫 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갈께”
이리하여 날짜는 정해졌고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만 했다.
아니, 오히려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드디어 잡힌 것이었고,
결국 함께한 숫자는 17명에 이르렀다.
<함께 산행을 한 일행중 백담사 코스의 14명,사공을 비롯한 동료 셋은 장수대에서 출발>
백담사를 기점으로 등반을 시작할 때 내리던 비로 속으론 날 한번 더럽게 잡았다고
투덜댔으나, 1,100고지를 넘어서며 눈으로 변하였고 소청에서 중청에 이르는 눈꽃 세상은
18년을 기다려 찾아온 설악이 내게 베푸는 웰컴 세레모니였다.
첫눈 맞이를 이토록 성대하게 해본 것 또한 일생 처음이다.
<11월8일 소청산장에서 찍은 빨간 열매에 눈이 소복>
중청산장에서 밥해 먹고 잠자본 일들, 한밤 중에 일어나 고요한 눈세상의
공기를 폐부로 들이마신 일, 훤히 자신의 모습을 보이진 않았지만
간혹 드러내던 공룡의 절경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영원하리라.
<11월 9일 공룡능선에서 나한봉에 이르는 오르막에서 만난 雪단풍,아직도 아름다움의 여운이 남아있다.>
더구나, 함께한 산사랑 동반자들의 넓은 아량과 도와주는 모습, 음식을 나누고 부족한 것을
채워주려는 모습은 진정한 휴머니즘으로 감동을 주었다.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이토록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아직도 가슴이 뿌듯하다.
일일이 표하진 못했으나 동행한 산사랑 산우들에게 감사한 마음 전한다.
<사공과 함께-그는 나를 산을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으로 대하도록 인도한 산스승이다 >
특히, 친구인 사공 하원산에게 감사드린다.
언제나 말없이 산행을 이끌어준 그가 공룡 속으로 나를 이끌어줌으로 16년간 쌓인 소원이
풀어졌으니 말이다.
산에 갔기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이었다.
(그래서 닉을 산에서 이로움을 득한다는 ‘이산’으로 정했는지도 모른다)
2008년 11월7~9일 설악등반을 마친 후...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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