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전 [예기禮記]가운데 [악기樂記]라는 글이 있다. 그 첫머리를 줄여서 옮겨보면 “무릇 음(音)의 일어남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는 것이라 했고 그 음(音)을 모아 악기에 담아 사람의 느낌을 이루어내는 것을 악(樂)이라 한다.” 이 문장은 음악의 뜻을 밝히는 옛 사람의 정신을 가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 있는 물음으로 다가온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소리(音)를 낸다. 그 울음은 검은 바다와 같은 어머니의 자궁을 벗어나 처음으로 숨을 쉬는 소리이다. 그 소리에는 일체의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지 않는 순수한 우주와 자신이 나누는 존재의 대화이다. 하기에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 어떤 소리보다 경이롭고 위대한 음악이다. 아이의 울음소리에는 오선지의 선율에 앞서는 감동이 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음은 모든 인간이 모두 그와 같은 경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찰나가 아닌 어느 정도의 시간 속에서 지속됨은 음악이 본질적으로 시간의 예술임을 알게 해준다. 미술의 경우 대개 하나의 작품이 있고 감상자가 그 작품을 바라보고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서 작품 앞에 ‘단독자’와 같은 모습이 된다. 물론 현대예술의 다양한 시도들은 예외이지만. 음악은 소리의 소리가 연속적으로 어떠한 규칙을 가지고 전개된다. 앞의 음을 기억하면서 이어지는 현재의 음을 들어야하고 어떤 음으로 발전해 가는지를 예측하며 듣게 된다. 이같이 음악은 시간 속에서 연속되어지는 예술이며 그 연속 안에는 앞의 음과는 또 다른 음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불연속이다.
음악의 이해가 시간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에서 음악의 기초적인 본질과 의미는 대상, 즉 음악작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활동, 즉 사람들의 행동하는 과정에 있다. 아울러 음악이라는 것이 음악을 하는 전공자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연주하는 것, 악을 듣는 것, 음악에 어울리는 춤을 추거나 시를 읊는 것 등을 포괄하게 됨을 알 수 있다. 그 어떠한 위대한 명곡도 그 작품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연주되지 않는 악보라는 것은 시쳇말로 오선지 위의 콩나물대가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은 크게 작곡자, 연주자, 감상자라는 세 가지가 음악이라는 하나의 정점으로 승화되는 트라이앵글이다. 그래서 음악학자 크리스토퍼 스몰(Christpher Small)은 ‘음악music'이라는 말 대신 ’음악하기musicking'라는 용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이 단절된 공간에서 무의미의 의미로 울리는 소리의 집합이 아니라면 인간의 삶 그 자체가 하나의 음악이다. 물론 음악이 예술로 승화되는 과정에는 단순한 삶의 재현(再現)만으로 부족할 것이며 새로운 창조로 ‘만들어진 자연’이 될 때 가능할 것이다. 삶의 모습이 좋은 것 나쁜 것, 선한 것, 악한 것, 고급스러운 것, 저속한 것으로 두부처럼 나뉘어 질 수 없는 몸처럼 음악에 대한 편 가르기는 그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집단에 의해 가치의 잣대가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것이다.
인간의 삶이 태어나서 마침내 죽음으로 가는 것처럼 음악도 전주곡에서 시작하여 피날레로 끝마치는 예술이다. 소리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기에 슬픈 마음에는 삼라만상이 슬픔의 소리로 울리는 것이며 기쁠 때, 화날 때, 즐거울 때마다 각각의 울림이 있을 것이다. 기쁘고 좋은 것만으로 채워지는 인생이 없듯 삶의 다양한 얼굴이 모여 마침내 악(樂)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하기에 음악을 들으면 세상의 삶을 알 수 있다는 성인의 말씀은 거짓이 아니며 밝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인간의 성정(性情)을 순화(純化)시킨 성현의 가르침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오늘날 우리가 귀 기울이며 들어야 할 음악이 무엇인지, 삶의 소리가 어떻게 울리도록 인생의 악보를 그려나갈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음악은 삶이다.
*[樂記]의 첫 부분을 옮겨 놓은 게 있습니다.
http://www.blogin.com/blog/main.php?datX=00702322&keyX=numr&keyY=00098088
출처
http://my.blogin.com/esmin69/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소리(音)를 낸다. 그 울음은 검은 바다와 같은 어머니의 자궁을 벗어나 처음으로 숨을 쉬는 소리이다. 그 소리에는 일체의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지 않는 순수한 우주와 자신이 나누는 존재의 대화이다. 하기에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 어떤 소리보다 경이롭고 위대한 음악이다. 아이의 울음소리에는 오선지의 선율에 앞서는 감동이 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음은 모든 인간이 모두 그와 같은 경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찰나가 아닌 어느 정도의 시간 속에서 지속됨은 음악이 본질적으로 시간의 예술임을 알게 해준다. 미술의 경우 대개 하나의 작품이 있고 감상자가 그 작품을 바라보고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서 작품 앞에 ‘단독자’와 같은 모습이 된다. 물론 현대예술의 다양한 시도들은 예외이지만. 음악은 소리의 소리가 연속적으로 어떠한 규칙을 가지고 전개된다. 앞의 음을 기억하면서 이어지는 현재의 음을 들어야하고 어떤 음으로 발전해 가는지를 예측하며 듣게 된다. 이같이 음악은 시간 속에서 연속되어지는 예술이며 그 연속 안에는 앞의 음과는 또 다른 음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불연속이다.
음악의 이해가 시간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에서 음악의 기초적인 본질과 의미는 대상, 즉 음악작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활동, 즉 사람들의 행동하는 과정에 있다. 아울러 음악이라는 것이 음악을 하는 전공자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연주하는 것, 악을 듣는 것, 음악에 어울리는 춤을 추거나 시를 읊는 것 등을 포괄하게 됨을 알 수 있다. 그 어떠한 위대한 명곡도 그 작품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연주되지 않는 악보라는 것은 시쳇말로 오선지 위의 콩나물대가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은 크게 작곡자, 연주자, 감상자라는 세 가지가 음악이라는 하나의 정점으로 승화되는 트라이앵글이다. 그래서 음악학자 크리스토퍼 스몰(Christpher Small)은 ‘음악music'이라는 말 대신 ’음악하기musicking'라는 용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이 단절된 공간에서 무의미의 의미로 울리는 소리의 집합이 아니라면 인간의 삶 그 자체가 하나의 음악이다. 물론 음악이 예술로 승화되는 과정에는 단순한 삶의 재현(再現)만으로 부족할 것이며 새로운 창조로 ‘만들어진 자연’이 될 때 가능할 것이다. 삶의 모습이 좋은 것 나쁜 것, 선한 것, 악한 것, 고급스러운 것, 저속한 것으로 두부처럼 나뉘어 질 수 없는 몸처럼 음악에 대한 편 가르기는 그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집단에 의해 가치의 잣대가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것이다.
인간의 삶이 태어나서 마침내 죽음으로 가는 것처럼 음악도 전주곡에서 시작하여 피날레로 끝마치는 예술이다. 소리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기에 슬픈 마음에는 삼라만상이 슬픔의 소리로 울리는 것이며 기쁠 때, 화날 때, 즐거울 때마다 각각의 울림이 있을 것이다. 기쁘고 좋은 것만으로 채워지는 인생이 없듯 삶의 다양한 얼굴이 모여 마침내 악(樂)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하기에 음악을 들으면 세상의 삶을 알 수 있다는 성인의 말씀은 거짓이 아니며 밝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인간의 성정(性情)을 순화(純化)시킨 성현의 가르침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오늘날 우리가 귀 기울이며 들어야 할 음악이 무엇인지, 삶의 소리가 어떻게 울리도록 인생의 악보를 그려나갈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음악은 삶이다.
*[樂記]의 첫 부분을 옮겨 놓은 게 있습니다.
http://www.blogin.com/blog/main.php?datX=00702322&keyX=numr&keyY=00098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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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y.blogin.com/esmin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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