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모두 입춘을 지나 우수(雨水)도 지나고 경칩으로 가고 있다.
바람결이 다르다. 찔려도 그리 아프지 않다.
햇살, 그 작은 조각들이 힘을 모아 세상을 바꾼다.
강물은 쉼없는 발길질로 얼음장을 부순다.
봄 쪽으로 발뻗고 있지만 밤은 여전히 춥다.
아직 겨울이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계절이 서로의 몸을 섞고 있다.
은밀하게 정교하게 서로를 받아들인다.
가장 화해로운 임무교대이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봄꽃을 피운다.
계절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을 만들어 계절을 마음으로 먼저 맞이하고
마음으로 떠나보낸 것이 아닐까.
입춘과 우수,
보냄과 맞이함이 있는 2월,
우리나라에서는 끝을 정리하고 시작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배움도 한 매듭을 짓는다. 학기가 끝나고 모든 학교가 졸업식을 거행한다.
재학생들의 송별노래, 특히 “우리들도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라는 구절은 지금 들어도
절절하다. 실로 2월의 노래였다.
그렇게 무서웠던 선생님, 그 선생님이 눈물을 보였을 때 얼마나 죄스러웠는지….
우리들은 학창시절의 친구들과 모두 2월에 헤어졌다.
앨범 하나씩 들고 봄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운동장을 빠져나와 교문에서 되돌아본 학교는
왜 그리 슬퍼 보였는지…. 가슴이 먹먹했다.
2월은 하루로 치자면 새벽녘이다.
막 일어나 이불을 개고 있는 시간이다.
이맘때쯤이면 산하가 잠에서 깨어나고 바람은 생명의 눈(眼)을 부지런히 실어나른다.
마을도 도시도 학교도 일터도 서서히 일어선다.
2월에는 모든 것들이 호흡을 가다듬는다.
처음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사회 초년병도, 한 학년이 높아진 학생들도,
논두렁 밭두렁을 거닐며 농사 구상을 하는 농부들도 마음을 벼렸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는 입춘을 맞아 풍년을 비는 농부의 설렘과 간절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옛날부터 농가에서는 입춘날 보리 뿌리를 캐보고 그 해에 풍년이 들것인가 흉년이
들 것인가를 점쳤다.
뿌리가 세개 이상이면 풍년이요, 두가닥이면 평년작이요,
또 한가닥이면 흉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2월은 예측의 시간이다.
그 속에는 막연한 불안감과 기대가 섞여 있다.
그래서 괜히 서성거린다.
허둥거리며 이것저것을 챙기다보면 금방 지나가버린다.
허망하다.
볼품도 없어 2월은 계절의 자투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길이란 길은 눈 녹아 질척거리고, 썰매를 지쳤던 저수지는 얼음이 녹아 축 처져 있다.
철새들이 그토록 떠들던 자리는 깃털만 나뒹굴 뿐 졸고 있는 듯 조용하다.
산 위에 희끗희끗 남아있는 잔설은 차라리 애처롭다.
나무 위에 핀 눈꽃마저 스러진다.
땅은 질퍽거리고, 툭하면 진눈깨비가 내리고, 얼어붙은 것들이 제멋대로 풀어져 흐느적거린다.
그래서 그 숱한 시인, 묵객들도 2월을 읊지 않고 그리지 않았다.
2월은 너무 은근하고 은밀하여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2월의 언덕에 서있으면 무엇 때문이라고 딱 꼬집을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온다.
허기짐이 있다. 2월이 열두달 중에서 가장 짧은 것도 안쓰럽다.
하지만 2월에는 출발 총성을 기다리는 숨가뿜이 고여 있다.
먹잇감을 노려보는 송골매의 날카로운 눈빛이 숨어 있다.
활시위를 당기는 긴장감이 서려 있다.
새 세상이 열리리라는 설렘이 담겨 있다.
아지랑이와 같은 봄멀미, 그 울렁거림이 있다.
찬란한 아침이 열리기 직전의 여명이 배어 있다.
겨우내 걸러낸 나무의 꿈이 나이테를 돌아나와 가지 끝에서 숨죽이고 있다.
갇혔던 세상의 온갖 풍문도 서서히 일어나 마을로 내려설 채비를 한다.
솔숲도 저희끼리 몸을 비벼 바람을 일군다. 땅에서는 맑은 기운이 솟아난다.
보이지는 않지만 엄청난 힘이 다가오고 있다.
온갖 생명붙이를 품은 대지가 일어나 하늘을 보고 있다.
아! 직전의 고요, 직전의 숨막힘, 직전의 설렘, 직전의 부릅뜸…
그래서일까?
2월의 바람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2월의 언덕에 서있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지난 2월의 시간을 나누어주고 싶다.
보낼 것을 다 보내고 다시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숨죽이고 싶다.
2월을 하루 남겨둔 오늘 문득 2월의 소박함을 느껴본다.
친구들이여, 2월을 잘 마무리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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